부산은 최대 합판 수출 도시였습니다. 1960-70년대에는 한국 합판생산의 절반을 생산하기도 했습니다. 부산 10대 수출품 순위에서 64년부터 68년까지 매년 1위, 70년대 중반까지만해도 수출상품 빅3 안에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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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목재 수출업체 6곳은 모두 해안가에 위치해 있었는데, 그중에서도 다대포만을 끼고 반도목재와 대명목재 2곳이 있었습니다. 74년도 당시 두 업체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합치면 전국 합판업체에서 약 10%에 해당하는 비중입니다. 다대포안에서 상당한 양의 나무와 합판들을 가공하고 생산하는 노동자들이 많았단 뜻이기 합니다.

<aside> 🗨️ “공장 출퇴근시간대에는 출퇴근 통근 버스가 도로에 꽉 차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로 많았다.” - 신현도, 다대횟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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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80년대에 들어 원목 확보가 어려워지고 수출이 중단되면서 내수용만으로는 합판 업계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특히 1982년 구조조정 문제로 대명목재와 반도목재가 이 시기 동명목재를 비롯해 함께 정리되었습니다. 구조조정은 정부주도로 진행되었고, 당시 부산에서 살아남은 회사는 성창기업뿐이었습니다. 성창기업은 반도목재를 흡수합병해 87년 다대동으로 이전해옵니다. 다대포에 목재공장이 있다는 것은 부산이 60-70년대를 대표하는 합판 도시였음을 알아가는 동시에, 다대포 사람들과 관계성도 엿볼 수 있습니다.

<aside> 🗨️ “성창 잘 돌아갈 때는 엄청 빨래를 밖에 못 널을 정도로 뭐가 많이 날아왔지 새카만 (매연 같은) 그런 게 막 많이 날아오고. 자유 아파트도 2010년도에 내가 자유 아파트 조금 살았는데. 뭐 하루에 두 번 세 번 닦는데도 새카맣더라고.” - 강경순, 다대포 토박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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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side> 🗨️ “여기 반도목재가 있으니까, 일주일에 한 번씩 나무를 못 쓰는 거 모아놔. 그러면 이제 없는 사람들 가져가라고 모아놓는 거라. 그러면 그 나무 무더기를 가져다가 재워놔. 서로 이제 땔감으로(쓰는거지).” - 윤복득, 다대포 해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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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 목재공장이 있어서 누군가는 매연으로 까맣게 변하는 창을 매일 닦는 불편함을 겪어야 했고, 누군가는 이곳에서 땔감을 주워다 자신의 삶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