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은 자염을 만들던 지역이었습니다. 소금밭을 보며 어린 시절을 보냈거나 명지염전에 대한 이야기를 연구한 구술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 시절 소금밭의 모습을 떠올려 봅니다.

명지, 녹산의 소금밭들 풍경

명지에는 염전이 참 많았어요. 하신, 중신, 평성, 해척 마을에도 염전이 있었고, 여기 명지 신포, 경등쪽에도 염전이 쭉 있었어. 여기 신호동 일대가 염전이었고, 녹산 쪽에도 화전동, 송정에도 있었어요. (박상기, 1939년생, 향토사학자)

염전을 (현재 하신마을 출장소부터) 저기 KR 건물까지 한 5만평 이래 했을거야. 보통 4~5천 평(한 집당)하는데, 이게 큰 기라. 요기가 염전자리인데, 한 7개 정도 있었어요. 소를 데리고 자꾸 왔다 갔다 해.(김재덕, 1940년생, 김양식업자)

전라도 맨코로 이 면적을 여러 개 이래 해가는데, 여기(소금 모으는 염막에) 가마솥을 걸어. 여기는 사람들이 목욕한다하면 20명 이상 앉아서 목욕할 정도로 큰 가마솥이었어.(김영모, 1951년생, 명지 농부)

신호, 그 섬에서 한 다섯 군데(염전업 하는 곳이)가 있었어요. 6·25 사변이 일어나는 것도 우리는 몰라. 그는 뭐 피난민들도 없고, 어디 피란도 안 가고 해 놓으니까 우리는 그냥 6·25 사변이 낫는갑다. 그거만 알았지. 그 염전이 바다 근처에 둑으로 둘러쌓여 있고 그랬는데, 사라호 태풍 때 그게 다 무너졌어.(임영숙, 1940년생, 옛 신호동 주민)

명지도, 신호도라 불린 곳에서 조선시대부터 자염을 생산하였습니다. 정확히 언제부터 생산했는지 알 수 없지만 조선 후기 이후 줄곧 자염을 생산을 해왔다고 합니다. 특히 구한말(1907년) <염업조사>에 따르면 명지면 소금밭의 수는 총 37개, 염전면적은 82.86町(환산 시 248,580평), 생산량은 37,287石(환산 시 ***5,965.92톤)***이나 되었다(류승훈, 2007)고 합니다.

일제시기를 거쳐 소금밭의 분포는 크게 변화하였습니다. 그 연유에는 낙동강 제방공사와 수문 설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 여파로 소금밭이 넓게 분포하고 있었지만, 서남단 해안가에 소금밭이 몰려들어 자염의 명성을 유지하였습다.

어르신들이 어린 시절 소금밭의 풍경은 아주 드넓은 땅에서 소금을 모으는 ‘소’와 염부들이 왔다갔다하는 모습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염이라는 특성상, 소금을 굽기 위해 가마솥은 필수였습니다. 이 가마솥은 사람이 초등학생 아이들이 20명 이상 앉을 정도로 아주 크나큰 가마솥이었음을 짐작해볼 수 있었습니다. 6.25전쟁이 일어나는지도 모를 정도로 평온하게 지나갔던 시절이 있었지만, 1950년대 이후 천일염 장려 정책과 태풍 사라호의 영향으로 이 평온함은 소금밭과 함께 사라지고 맙니다.

*아래 링크에서 Salty Layers와 연결 지어 명지, 녹산의 소금밭들 풍경을 다시 상상해 보시길 바랍니다. 👇아래 링크에서 연표와 경관 다시 보기

Salty Layers - 연표 살펴 보기

Salty Layers - 경관 변화 보기